언젠가 읽은 아들러 책에서 인간관계가 고통의 시작이라는 얘기를 얼핏 본 것 같다. 그리고 해외에 살게 된 지금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인과의 인간관계란 그 어떤 인간관계를 통틀어 가장 어렵다고 느껴진다. 사람들이 그렇게 차갑고 친해지기 힘들다며 혹평을 하는 독일인 보다도 말이다.
해외에 나와 사는 한국인들은 크게는 두 가지 정도 부류로 나눠지는 것 같다. 한국인을 기피하는 한국인과 한국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한국인. 뭐 각자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그 나라의 언어를 잘 배우기 위해 혹은 한국인 특유의 성격이 싫은 사람들은 한국인을 일부러 피해 다니고 한국인 특유의 성격이 좋은 사람들은 한인회에 가입을 하거나 오픈 카톡 등에서 한국인을 만나 친하게 지내는 듯하다. 나는.. 그 중간 즈음이랄까? 한국 채널에 몇 군데 가입이 되어있긴 하지만 일부러 한국인을 만나려 애쓰진 않는다. 그러다 적적한 마음이 들 때 한두 번씩 한국인을 만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한국인이지만 한국인과의 인간관계는 특히 어려운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름 분석해 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나의 기대치
같은 한국인이니까..
일단 같은 한국인이니까 금방 친해지겠지 금방 편해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기저에 깔려있다. 같은 나라 출신이니까, 우리는 모두 해외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전우니까 가치관이 달라도 성향이 달라도 절친처럼 금방 친해질 거야. 왜냐면 전우애란 그런 것이거든!
..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나의 경우 해외에 나오기 전의 인간관계는 거의 동창뿐이었다. 물론 사회에 나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정말 친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내며 자라온 동창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인맥에 대해 아쉬울 것이 없었고 별로 친해지고 싶은 욕구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친인척 하나 없는 외국 땅에 뚝 떨어지다 보니 처음 몇 년은 언어 배우랴 해외 생활에 익숙해지랴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친구를 만드니 어쩌니 하는 생각은 사실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문화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고 말도 좀 하겠다 그러다 보니 이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친구를 제대로 사귀어본 경험이 없으니 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마음을 주는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여기도 그냥 연락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생기겠지 친해지겠지 하는 이기적인(아들러 심리에서는 이런 것을 "이기적"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호기롭게 몇 명의 한국인을 만났지만 인연으로 이어나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 상처도 정말 많이 받았고 사실 서운함에 좀 울기도 했다. ㅎ 나는 그렇게 전형적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상대는 원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을 그냥 무작정 퍼주고 상대로부터 마음을 돌려받지 못하면 화가 났던 것이다.
한국인과의 인간관계도 딱히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와 사실 크게 다를 건 없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성향이 맞지 않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하면 인연으로 이어질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인간관계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그 당시 나는 마음을 주는 친구들이 이미 있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당시, 남편이 몇 년을 늘 먼저 연락하고 먼저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남편의 그런 모습에 '너를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사람과 굳이 인연을 이어가야겠냐'라는 말을 했지만 당시 남편은 '누가 먼저 연락하냐 이런 걸 따지기보단 그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연락하면 되지'라는 말을 했었다. 당시에는 참 속도 좋다 라며 답답해했지만 지금 그 친구는 남편의 절친 중 한 명이 되었고 마음을 주고받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마음을 주고 싶으면 주되, 돌려받고 싶다는 마음은 고이 접어두어야 하는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과제'라고 표현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나의 과제"이지만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상대의 과제"이기 때문에 상대의 과제를 내가 대신하려고 할 때 그때 괴로움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2. 다른 한국인과의 비교
쟤는 벌써 저만큼 하는데 나는..
참 이상하게도 나의 경우 비교는 꼭 한국인하고만 하게 된다. 아무래도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는 단점이 이런 것 같다. 한국에서의 삶은 태어나서부터 비교와 경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누군가와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도 내가 자신과 본인을 비교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고 본인도 속으로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악순환(Teufelskreis)은 끊어질 수 없게 된다.
특히나 비교라는 것은 나와 비슷한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하게 되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 더 우월감 내지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나랑 똑같이 아베체데부터 어버버 하며 독일어를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도 어학을 하고 있고 상대는 이미 직업을 구해서 독어도 블라블라 잘 떠드는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진다. 여기에 은연중에 드는 상대에 대한 분노와 그런 감정을 인지하고 나를 달래려는 마음 그리고 여태까지 나는 뭘 했을까 하는 자책이 어우러져 그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지는 것이다.
나도 물론 나보다 훨씬 빨리 독일에 적응하고 번듯하게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낀다. 하지만 늘 마음속에서 의식적으로 이런 마음을 부정적으로 끌고 가지 않으려 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모두의 하이라이트는 각자 그때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냥 힘듦
먹고사는 게 힘든데 무슨..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에서도 일단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하면 상위의 욕구는 들지 않는다고 한다. 타국에 와서 타 언어를 배워 그 언어로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복지가 좋은 것을 떠나서 그냥 그 행위 자체가 외국인 에게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요시킨다. 나도 일할 때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하루 종일 독일어로 떠들다 집에 오면 말 그대로 녹초가 된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큰 사람의 경우 이미 먹고 사는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에 인간관계고 뭐고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경우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는 것이다.
4. 서로에 대한 엄격한 잣대
넌 완벽하지 못해, 그러니 아웃이야
이것도 2번과 관련이 있긴 한데 내가 느낀 한국은 서로에게 완벽하기를 강요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책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완벽을 요구한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 엄격한 잣대는 역시 같은 한국인 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동족 혐오'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나 내가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할 경우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의 어떤 성격이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며,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보다 우월한 상대를 만나고 싶어 한다. 연인관계에서도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고 많은 여성들의 이상형 중 하나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인 것도 이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서 거슬리는 점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너 이런 인간이었구나? 만나봤자 쓸모없겠구나 나에게 도움되지 못하는 사람이겠구나 하며 손절을 치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한국은 도덕적인 잘못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한번 무언가 일이 터지게 되면 그 사람은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연예인은 완벽한 인간상의 예시가 아닌데 물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혼나야 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내 생각에 살짝 과도하게 심판이 내려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연인 사이에서 누군가 바람을 폈대, 환승을 했대 혹은 더 심한 경우 불륜을 저질렀대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주변인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엔 도덕적인 잘못을 저질렀으니 너라는 존재는 이제 없어져야 할 존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반면에 독일은 한국처럼은 과민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느껴진다.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 경우엔 그 사람이 저지른 어떠한 잘못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일부에 불과할 뿐, 이것 이외에 이 사람은 좋은 점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인 나의 시각에서는 독일이 실수 내지 잘못에 대해 더 관대하다 느껴진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나도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서로 도와가며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서로 어우러져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상대에게 엄격하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나에게 엄격하다는 뜻이니 말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이것이 독일과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생각은 절대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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